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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하면서
레인보우 아시아
    하노이 - 서울 - 케이프타운
  
                        
                                      
호치민, 먼길의 시작

1994년 겨울이었던가. 내 여권에 새겨진 베트남의 첫인상을 잊지 못한다. 붉은 바탕에 금색별이 박힌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나는 그 비자가 붙은 여권을 펼쳐들고 김포 국제공항의 출국창구 앞에 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직원은 여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가며, 몇 번이나 쏘아보듯 훑어보고 나서 기어코 출국신고서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 편명을 빠뜨린 것이다. 비행기 티켓에 편명이 적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출국신고서를 다시 써오도록 했다. 화가 났던 것은 아니다. 겨울임에도 이마에 땀을 흘리며 출국창구를 통과했을 뿐이다. 베트남으로 갈 수 있게 허가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했다. 나는 신기한 눈길로 내가 빠져나온 출국심사대를 되돌아보았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베트남으로 가는 날이었고, 첫 외국여행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국경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서른다섯 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인생의 반환점이었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은 나이. 모든 여행에는 반환점이 있는 법이다. 되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 짧게 마련이다. 돌아올 수도 없을 만큼 더 멀리 가버리기 전에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지나온 길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가 발을 딛고 선 대지는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심하게 요동하고 있었다. 세계의 질서가 바뀌고 있었다. 그동안 분명하다고 믿어졌던 많은 가치들이 의심받거나 폐기처분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도 20세기는 이미 그렇게 서둘러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 몫은 새로운 천년에 대한 준비가 아닌 서른다섯의 내 나이를 감당하는 일이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희망을 안고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해가 바로 1980년이었다. 실기시험을 거쳐 17: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간 대학에서 내가 쓴 시의 편수는 내가 써야 했던 유인물의 숫자에 훨씬 못 미쳤다.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피멍투성이의 해태제과 여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유인물에서 썼던 모든 언어들에 대해 후회했다. 나는 학교에서 공장으로 옮겨갔다. 그것이 내가 함부로 사용한 언어들에 대해 책임지는 길이라 생각했다.  

10여년을 공단에서 보내며 ‘얼굴 없는 작가’로 문단에 나와야 했던 나에게, 90년대는 80년대와는 또 다른 곤혹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저무는 20세기와 다가오는 21세기 사이에서 나는 그냥 견뎌보기로 하였다. 새로운 시대적 기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청춘을 건 시대와 함께 사라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은 알고 싶었다. 우리가 지나온 20세기의 길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21세기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돌아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있어야 했고, 내다보기 위해선 다른 좌표가 필요했다. 그것이 왜 꼭 베트남이었을까. 안이 아닌 밖에서 내가 살아온 사회를 바라보고 싶었다. 한국과 다른 방법으로 20세기를 산 이들의 삶에 나를 비춰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20세기를 지배한 서구를 거울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21세기가 20세기와 달라야 한다면 20세기와는 다른 좌표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정복자의 욕망이 아닌 정복당한 자의 꿈, 지배자들의 논리가 아니라 지배를 견뎌낸 자들의 지혜와 상상력과 만나고 싶었다. 지배자의 용모를 준거로 편성된 미학적 질서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가 빚어낸 미학적 질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베트남에 첫발을 디딘 이후로 내 여권의 많은 페이지들이 베트남 비자로 채워졌다. 유럽을 오갈 수 있는 마일리지의 절반쯤은 베트남을 오가며 쌓였다. 십여 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여권에 출국 스탬프가 찍혀 되돌아오는 데 채 일 분도 걸리지 않는다.

여러 해에 걸쳐 구상하고 준비해온 일이었지만, 막상 [아시아]의 발간 작업을 시작하고 나자 무엇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다. 꽤 분명할 것 같았던 매체의 역할과 성격부터 재점검을 요구받았다. 머리 속에 있는 것들과, 그것을 문자로 객관화하는 일 사이에는 언제나 쉽게 메워지지 않는 심연이 존재했다. 지면을 편성하고, 그 지면을 감당할 원고를 확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번역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아시아]의 창간 작업에 참여한 이들이 무엇보다 고민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어떻게 [아시아]라는 이름에 값하는 지면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아시아]를 어떻게 아시아의 창조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정신적인 자유무역지대로 가꾸어갈 것인가.

창간 작업을 맡은 것이 한국의 작가들이고, 인쇄되는 곳도 한국이지만 [아시아]의 지면은 창조적 상상력을 지닌 아시아인 모두의 것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시아]의 창간을 준비한 이들의 확고한 원칙이었다. 서남아시아에 네트워크를 가진 팔레스타인, 동남아시아에 네트워크를 가진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에 네트워크를 가진 몽골 작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한국에서 이 일을 진행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왔고, 이대환 발행인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다녀왔다. 네 차례에 걸친 내부세미나와 밤샘토론, 아시아 7개국 작가 초청 심포지엄을 거치면서 [아시아] 지면의 윤곽이 잡혔다.  

[아시아]의 모양새에 대한 최종 확정을 앞두고 나는 다시 호치민행 여객기에 올랐다. [아시아]의 창간을 위해 굳이 내가 베트남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어 있던 내 상상력의 한 부분을 채워준 친구들과 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상의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호치민시의 친구들은 잡지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일처럼 반겼다. 일간신문 [사이공해방]지의 문화부장 응우롱은 주먹 쥔 손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거야!”
친구들의 유쾌한 반응에 조금 안심이 된 나는 감추어둔 걱정들을 털어놓았다. 아시아 47개국의 창조적 상상력들을 어떻게 한 지면에 담아낼 것인가. 서로 대등한 관계를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그러나 내가 염려하는 것들을 친구들은 그들 특유의 낙관으로 차례차례 지워나갔다.
“국경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제각기 다른 자연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온 상대로부터 배우고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말이야. 서로 다르지만 자연이 국경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문학도 그럴 테니까.”
또한 시인 반레는 말했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우리를 만나온 것처럼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대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이해시키려 들었다면 오늘과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었겠어?”

반레가 말하는 그대들이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두고 한 말이다. 1995년에 발족한 이 모임의 명칭에는 함께했던 한국작가들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담겨 있다. ‘베트남을 사랑하는’도, ‘베트남과 연대하는’도 아닌 ‘이해하려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사랑을 우리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랑과 연대가 어떻게 상대에게 폭력이 되는지를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통해서 보았고, 지금의 이라크에서도 보고 있다. 작가 앞에 ‘젊은’이라는 서술어를 사용한 이유는 그 당시 구성원들의 나이가 삼십대로 젊기도 했지만, 낡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선입관도 없이 상대와 교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무엇무엇하는 ‘문인회의’나 ‘작가협회’와 같은 명칭 대신 ‘작가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 역시 제도화된 형식에 포괄된 조직이 아닌 개별 작가들의 자발적 관심에 따라 움직이는 소박한 조직을 만들겠다는 문제의식의 반영이었다.

십 년 넘게 이어져온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이런 정신에 대체로 충실했다. 규약도 회칙도 없는 이 모임은 참석하면 회원이고 빠지면 회원이 아니었다.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의무나 봉사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모임은 누가 회원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았다. 한두 해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도 어느 날 나타나면 회원이었다. 스스로 회원이라고 여기면 회원이고 아니라면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작가들이 방문하면 일정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갈 때까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분담해서 감당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자신의 차로, 사비와 시간을 털어가며 맡았지만 누구도 짐을 나누어 지지 않는 회원들을 탓하지 않았다.

이 조직 같지 않은 조직,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작가들간의 교류와 저술• 번역 출판과 같은 활동을 통해 양국의 거리를 좁히는 데 기여했다. 한국에 번역 출판된 바오닝의 장편 『전쟁의 슬픔』과 반레의 장편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휴틴의 시집 『겨울 편지』는 허리우드 영화가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베트남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원 작가들이 세계를 보는 시선의 지평이 달라졌다.
호치민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반레의 장난기어린 연극적 대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딘가에 닿게 될 것이다.”
동석한 친구들은 모두 웃었다. 그 대사는 내가 그를 모델로 해서 쓴 소설 [존재의 형식]에 등장하는 반레의 대사였다.


하노이에서 다시 길을 묻다

호치민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는 물의 도시다. 도시 외곽으로 홍강이 감싸 흐르고, 시내 곳곳에 호수가 있다. 내가 투숙한 탕러이호텔(Victory Hotel)은 하노이에서 가장 큰 서호(西湖)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호수로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노을 지켜보다 잠깐 잠이 들었다.
머리맡에서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시를 쓰는 쩐광다오였다. 바오닝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며 둘이서 먼저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했다. 창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약속 장소에는 여성작가 투이즈엉과 이반, 화가인 이반의 남편도 함께 나와 있었다. 이미 몇 차례 대작을 한 적이 있는 이반의 남편은 술상무로 징발당해 온 가여운 처지라고 농담을 했다. 간이 나빠진 쩐꽝다오가 술을 못 마시는데다, 바오닝마저 빠지자 그가 불려나온 모양이었다.
“바오닝은 벌써 많이 마신 모양이지?”
내가 불쑥 묻자 쩐꽝다오는 놀란 눈으로 되묻는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멀리서 술친구가 왔는데 안 나오면 세 가지 이유밖에 더 있겠어? 사랑에 빠졌거나, 지하운동에 뛰어들었거나, 술에 무너졌거나.”
  
나는 밤늦도록 베트남 작가들의 관심사와 문예지의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작가의 위상은 하락하고 문예지는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아시아]의 성공 여부는 아시아의 작가들이 그 지면에 자기의 글을 발표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할지, 아닐지에 달린 거라는 쩐꽝다오의 마지막 말이 숙소로 돌아오는 (삭2자)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저녁에 만난 바오닝의 표정은 예의 장난스러웠다.
“우리의 앞길을 누가 알겠어. 너무 큰 목표나 기대를 걸지 말고 재미있게 일을 했으면 좋겠어. 우선 아시아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역할만 해도 대단한 거 아냐. 베트남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있는 라오스를 형제 나라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라오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독일과 프랑스 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라오스의 소설은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으니까.”
  
날마다 뉴스시간에 만나는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문학을 읽어본 한국인은 몇 명이나 될까. 태국과 카자흐스탄, 한국의 문학을 읽은 아시아인은 몇 명이나 있을까. 지도 위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아시아의 이웃들이 너무 많다.

국제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베트남작가 바오닝은 정확한 번역의 필요성과 번역자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면서 이중번역만은 제발 피하자고 했다.
“모든 언어로 다 번역할 수 없으니까, 우선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우린 근본적으로 각자의 고유한 언어가 지닌 중요성을 존중해야 해. 다양한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문화적 다양성은 거짓말이야.”
베트남 현지에서 [전쟁의 슬픔]을 베트남어로 읽은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바오닝의 ‘전율적 문장’에 휘감겼던 충격을 토로하며 이중번역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너무 큰 목표나 기대를 걸지 말자며?”
나는 바오닝이 처음에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핀잔을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다. 모국어도 서툰 유아 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들만큼 ‘세계화의 열망’이 높은데도 캄보디아 문학작품을 옮길 수 있는 번역자는 단 한 명도 없는 현실, 이것은 결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 미안, 욕심 접을 게. 한국의 열일곱 살 젊은이가 동남아 여행을 와서, 왜 이렇게 야만적이냐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만 [아시아]가 역할을 하자구. 그런데 한국 청년들이 이 잡지를 읽긴 읽을까.”

술집이 문 닫을 준비를 할 무렵 바오닝은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그런데 말야. 박주띤(북조선)은 어떻게 되는 거야? 북조선 문학은 어떻게 할 건데?”
이미 하고 있던 고민이었지만, 베트남에서 바오닝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오닝은 어린 시절에 주 베트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근처에 살았으며, 반레와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에 전쟁터에 나가 친구들 거의 모두를 잃은 전사 출신이었다. 그들의 친구들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죽어가는 동안 북한은 그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남한은 미국의 제1동맹국으로 연인원 32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러나 지금 남한 작가인 나는 그들을 만나고 있고, 그들은 북한 작가들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하노이를 떠나기 전에 베트남의 국민작가 썬뚱 선생의 집에 들렀다.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 호치민, 보 응웬 지압 장군, 팜 반 동 수상의 측근이자 제1급 전상자인 그는 국가에서 집을 내주겠다는 특혜를 마다하고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 안의 다락방 집에서 여전히 꼿꼿하게 살고 있었다. 그의 다락방 밖 옥상을 나는 ‘하노이의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부르곤 하는데, 그곳에 앉아 생각했다.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밟아왔지만 서로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한국과 베트남, 서로 총을 겨누기도 한 양국의 슬픈 역사 속에 자리 잡은 20세기 인류의 야만. 식민지배, 분단, 전쟁… 그러나 그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20세기 인류가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꿈꾸었던 이상도 그 안 어딘가에 숨 쉬고 있지 않을까.


서울, 분단에 갇힌 상상력

영국에서 머물다 잠시 귀국한 황석영 선생을 일산에서 만났다. 이 년간 런던에서 머물다가 최근 파리로 거처를 옮긴 그는 국제적인 노동이동을 다룬 작품을 쓰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유럽의 문제이기도 하고 아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며, 한국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작업은 그가 왜 유럽에 머물고 있는지에 대한 문학적 답변처럼 여겨졌다.

우리는 크롬바커라는 독일 이름을 가진 일산의 술집에서 밤늦게 만났다. 지난해 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열리는 독일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변함없이 열정적이었다. 젊은 후배 작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가장 늦은 시각까지, 가장 많이 마셨다. 연일 술자리를 주도했지만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술자리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에는 바다에서 빠져나온 사람 같은 느낌이 묻어났다. 술자리는 그에게 머리와 마음을 씻고 나오는 목욕 같은 의식에 가까워보였다. 호출을 받고 룸메이트인 평론가 방민호와 내가 그의 방으로 건너가면 그는 말짱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며칠에 걸쳐 새벽까지 우리가 주고받은 이야기에서 가장 자주 오간 단어는 ‘세계’와 ‘아시아’였다. 세계의 질서, 아시아의 미래, 아시아 작가의 운명...... 그는 ‘세계시민이 되겠다’고 했다.
  
그에게 요즘 유럽의 분위기를 물었다.
“파리와 런던의 지식인들? 지금까지 잘 지냈고 잘 놀았다, 이제 밀어두었던 현실로 다시 돌아가자, 이런 거야. 그들이 현실로 복귀하지 않을 수 없게 유럽의 현실이 엄중하거든. 낡은 제국의 안으로 제3세계가 들어와 버렸으니까. 대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어. 파리와 런던 거리에 나가면 유색인투성이야. 예전에는 식민지, 제3세계, 이건 그들의 밖에만 있었잖아. 유럽을 지탱하는 중산층의 복지와 미래, 굉장히 불안해."
  
아시아의 문학은 유럽에서 어떤 대상일까.  
“유럽은 그들이 과거에 식민지로 거느렸던 나라에 관심이 많잖아. 지식인들도 그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더 관심이 많지. 그러나 유럽의 작가와 지식인들에게 ‘아시아’는 지금 주요한 화두야. 빈약한 서사를 비서구권에서 찾고 싶어 하니까. 아시아는 흥미로운 대상이지.”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부여한 ‘주빈국’이라는 감투를 얻어 쓰고 독일로 달려가 안쓰럽게 애쓰던 한국문학이 떠올라, 나는 잠시 씁쓸했다. 유럽의 미학적 질서를 향해 어필해보라고 제공한 전시장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삭1자)어야 했다. 내 모국어의 대지에 발 딛고 선 인간의 일상을 나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내 모국어의 영토는 지금 어떤가?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식량전쟁을 치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먹어서 다이어트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북에 대한 선제공격을 공언하고, 북은 선제공격은 미국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모국어의 대지가 겪고 있는 곤혹과 딜레마에 대해 고민도 대답도 없는 작가가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베트남에 다녀온 얘기를 하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남쪽의 작가들은 북쪽의 문학을 어떻게 만나야 할까. 북과의 모든 접촉이 반역행위로 처벌되던 시절에 북을 방문해서 북의 작가들을 만났던 그였다. 그는 해외망명 5년, 투옥생활 5년을 그 대가로 지불했다.
“북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렇지만 북만 분단에 묶여 있는 것 같아? 분단의 자루 밖에서 바라보면 남쪽의 안목도 답답하기 짝이 없는 거야. 문학도 예외가 아냐. 남쪽의 작가들 중에 분단의 옹색한 자루 안에 갇혀 있지 않은 작가들이 얼마나 돼?”
  
그렇다면 북쪽의 작가들은 남쪽의 작가들과 어떻게 만나고 싶어 할까.
“그들도 작가야. 왜 모국어의 분단된 영역을 고민하지 않겠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기다려줘야 해. 그냥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자루에서 나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준비하며 기다려 줘야 해. 북쪽 작가들의 사정, 그대도 그들을 만나봤으니까 잘 알잖아?”

지난해 여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담의 실무대표를 맡았던 나는 다른 작가들에 앞서 평양에 갔다. 나는 북에 발을 딛기도 전에 분단과 마주쳤다. 2005년 7월 19일,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나는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가는 고려항공 JS 152편 비행기 안에 있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압록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강한 북쪽 억양의 안내방송을 들으며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자욱한 안개뿐이었다. 한번도 발 디뎌본 적 없는 분단조국의 북측 국경을 넘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내 손에는 아직 두 개 항목을 채우지 못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국신고서가 들려 있었다. 국적? 여러 나라를 드나들면서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는 이 항목이 문제가 됐다. 대한민국, 한국, 남한, 남조선…. 15분 후 평양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나서 나는 ‘남’이라고 썼다. 마지막으로 비어 있는 항목은 민족이었다. 민족? 한국민족, 조선민족, 배달민족…. 어느 표현도 적합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뭐라고 써야 하는지 물었다.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단 젊은 여성은 자신의 입국신고서를 보였다. 조선사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쓸 수 없었다. 평양공항에 도착하기 직전에 나는 우리 민족’이라고 썼다.
  
분단은 군사분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의 삶 어디에나 있다. 평양행 기내에서 만난 입국신고서는 지금까지 내게 익숙했던 문법만으로 북을 만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의 시작이었다. 북에 머무르며 북의 작가와 당국자를 상대했던 남북작가대회 기간 내내 나는 내가 사용해온 모국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자정이 넘었다. 술자리를 옮겼지만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다른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이야기가 한국문학으로 넘어갔다. 작가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소설이 팔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약간 짜증을 냈다.
“내러티브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지금 한국영화들이 보여주는 내러티브를 보라고. 소설에 서사도 현실감도 없다면 말이야 아예 내 사는 것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국소설 읽지 않겠어? 그게 당연하지 않겠어?”
  
반짝반짝 ‘작은 별’은 많이 출현하지만 튼튼한 안목과 자기만의 개성을 지닌 젊은 작가를 좀처럼 내놓지 못하는 한국문학......  
나는 그의 유럽 체류가 작가의 ‘동물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석영의 문학은 지금까지 늘 당대의 문제적 현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것은 그 개인에게는 고통이었을 수 있지만 그의 문학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그의 문학이 놓인 지점이 반드시 의도된 것만은 아니었겠지만 우연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로서의 동물적인 감각이 그를 그 자리에 놓아두었을 것이다.
  
분명 서구 중심의 가치와 질서는 한계에 부딪치고 세계는 새로운 공간편성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고 비서구가, 아시아가 자동적으로 서구의 대안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고적 한자문화에 대한 취향이나 신비화된 인도문화, 종교적 근본주의와 같은 것들이 아시아를 아우르는 가치일 수는 없다.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가치가 될 수도 없다. 동도서기와 같은 절충주의도 길은 아니다. 서구 중심의 근대를 극복하는 동시에 근대를 완성해야 할 이중의 과제를 아시아는 안고 있다. 서도서기하고 동도동기하며, 필요하다면 서도동기 할 수도 있어야 한다. 대립과 전쟁으로 얼룩진 지난 세기의 세계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서구와 비서구의 경험과 지혜, 모두가 활용되어야 한다.
  
[아시아]를 포함한 몇 개의 제호를 일러주었던 신상웅 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그 뒤에도 [로터스], [레인보우], [아시아와 문학] 등의 제호가 거론되었다. 내 문학의 엄부인 그는 다시 한번 다짐을 두었다.  
"이것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 매체는 똑바로 자기자리를 지키기만 하면 돼. 문학은 작가가 하는 것이지 매체가 하지 않아.“
[아시아]를 준비하면서 했던 큰 고민의 하나는 우리가 아시아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가, 서구중심의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없다’였다. [아시아]의 역할은 아시아의 대지 위에서 출현하고 있는 창조적 상상력이 세계를 설득할 수 있는 있는 통로를 성실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대지 안팎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의미 있는 작업들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 아시아의 몫이다.
  
“대세를 좇지도, 대세가 되려고도 하지 마.”
눈치를 보는 것은 대세를 좇기 때문이고, 타협을 하는 것은 대세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상웅 선생의 지론이다. 그의 말은 나에게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평생을 그보다 꼿꼿하고 담백하게 살아온 어른을 나는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매체의 대상만 아시아로 넓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아시아 규모로 넓어져야 하는 거야. 분단과 내부갈등, 이런 한반도의 문제도 아시아가 안고 있는 문제의 일부로 바라보고 접근하는 시야를 가져야 [아시아]지.”
  
그의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아시아의 가장 위험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곳이 한반도인 셈이다. 이것은 나와 한국의 작가들이 먼저 [아시아]라는 통로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은 베트남과 함께 20세기가 아시아 국가들에게 안겨준 고통을 빠짐없이 통과해왔다. 상당한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20세기가 남겨놓은 가장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는 나라다. 이라크가 겪고 있는 참화를 남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이라크에 파병을 하는 딜레마를 가진 나라다. 대립과 전쟁이 아닌 화해와 평화를 가장 절실한 현재 진행형의 과제로 안은 나라에서 [아시아]는 발의되었다.

  
아프리카에서'레인보우'를 생각하다

인천을 출발해서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까지 오는 데 정확히 하루가 걸렸다. 현지 시간은 한국보다 일곱 시간 이른 12시 45분. 나는 손목시계를 풀어 시계를 뒤로 돌려 현지시간으로 맞췄다. 공항에서 케이프타운대학교로 가는 6차선 대로의 왼편으로는 판잣집이 즐비했고, 오른편으로는 반듯한 주택가들이 들어서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양쪽이 오갈 수 있는 통로는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내가 묵은 숙소는 케이프타운대학교에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집’이었다. 방은 호텔만큼 깔끔했다. 시차 탓인지 새벽에 눈을 떴다. 나딘 고디머의 소설 [보호주의자]를 꺼내 읽었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녀는 백인이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작품이 잉태된 대지에서 그것을 읽는 일은 조금 특별한 감흥을 준다. 아프리카의 피가 몇 방울은 내 몸 안에 스며들어 반응하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빈 일정을 이용해서 희망봉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이석호 형이 시간을 내주었다. 응구기 와 시옹고, 치누아 아체베를 한국에 소개한 그를 통해 아프리카는 내 상상력의 일부가 되었다. 지구 대륙의 최남단 케이프포인트에 올라가서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 몸을 섞고 있는 바다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희망봉은 케이프포인트 아래의 언덕에 있었다. 바스꼬 다 가마의 항해를 그린 책에서 희망봉은 얼마나 멀고 먼 곳에 있었던가. 나는 바닷가로 내려가 바지를 걷고 발을 담갔다. 가을로 접어든 바닷물은 차가웠다. 한국은 봄이다. 내가 일곱 시간을 거슬러오는 동안 두 계절을 건넌 사실을 깨달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지도를 꺼내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새삼, 지도 안의 유럽은 참으로 작다. 유럽의 문학을 읽고 세계를 상상하며 자란 나에게 유럽은 거대한 대륙이었는데.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에게 이석호 형이 한 마디 했다.
“콩고 하나가 서유럽 전체 크기하고 같다는 거 아세요? 그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어요. 정확히 말하면 벨기에 국왕의 개인영지였지요.”
  
그는 탈식민지문학을 전공한 영문학자다. 여느 영문학자는 물론이고, 탈식민지 전공자들도  모두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데 그는 아프리카를 선택했다. 탈식민지를 공부하려면 탈식민지를 과제로 안고 있는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 식민지 민중의 삶을 모른 채 어떻게 탈식민주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영어도 그렇다. 영국과 미국만의 언어는 아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영어권의 국가가 54개국이나 된다. 이들 국가 가운데 8할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에 있다. 2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영문학의 범주도 반드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한 재구성은 유럽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유럽의 눈으로 선택되고 유통되는 질서가 유지되는 한 문화적 다양성은 빈말일 뿐이다. 각 대륙이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을 읽고 발언해야 한다. 유럽의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여과장치를 거치지 않고 각 대륙에서 출현하는 창조적 상상력이 자유로이 서로의 대지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아시아]가 아시아 -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도 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이석호 형과 같은 희망을 안고 나는 두 계절을 거슬러 아프리카에 와 있다.
  
이튿날 나이지리아 출신의 평론가 하리 가루바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연구소로 찾아갔다. 케이프타운대학의 아프리카연구소 부소장이기도 한 그는 [아시아]의 편집자문역을 맡아주기로 했다. 그는 아프리카문학 전반의 상황을 장르, 경향, 작가별로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아프리카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쉽게 국제성을 획득했다. 식민지 본국 언어가 가진 국제성 덕분이다. 예전에 아프리카 문학의 관심이 반식민주의 투쟁에 있었다면 지금은 유럽의 눈으로 그릇되게 재현해 놓은 아프리카에 대한 형상을 바로잡는 데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봤는가? 자연은 아름답고 사람은 무지한, 그런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케이프타운대학 교수로 20년 동안 재직했던 존 쿳시를 비롯해서 네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그들보다 더 높게 평가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들이 따로 있다. 치누아 아체베와 응구기 와 시옹고 같은 작가들이다. 아프리카 작가들이 가진 아시아 문학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하리 가루바는 의심의 여지없이 크다고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알려진 아시아 작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 김지하를 비롯한 소수였다.
 
아시아가 통일적인 무엇으로 외부에 인식되고 있을까. 하리 가루바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바로 유럽식의 위험한 발상법이다.”

남아공의 선거일인 3월 1일. 오전에 나는 OBZ카페에서 제임스 메튜를 만났다.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한 남아공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는 77세의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했다. ANC(아프리카민족회의)에 투표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남아공에서 권력이동이 지닌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해요. 오늘 내가 행사한 투표권은 흑인정권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일하는 정권을 지지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그의 말장난이 아니다. 세 차례나 큰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재작년에 집권 ANC의 의장이자 대통령인 음베키가 주는 문학상을 3주 동안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어떤 정당이 주는 상도 받을 수 없다며 상을 주는 것이 ANC인지 국가인지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국가 전체를 대표해서 대통령이 주는 것으로 정리된 다음에야 그는 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ANC를 지지하지만 자신은 ANC의 시인이 아니라 남아공의 시인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국외자들이 볼 때는 남아공의 정권이 백인에서 흑인으로 넘어갔다고만 생각하겠지만 아니에요. 소수 특권층에서 다수 민중의 손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60년대 우리의 슬로건은 ‘검은 것은 아름답다’였어요. 그러나 지금 우리의 슬로건은 ‘민중은 아름답다’예요.”
  
제임스 메튜는 가난한 흑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두 개의 작은 방이 있는 집에서 일곱 형제와 함께 자랐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신발을 신어보지 못했다. 책을 살 수 없었던 문학 소년은 흑인도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까지 먼 길을 맨발로 걸어 다녀야 했다. 고등학교를 2학년에 중퇴하고 신문팔이와 사환으로 전전하던 그는 열일곱 살에 작가가 되었다.
“권력이 바뀌었지만 가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빈곤과 흑백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남아공에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문학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요. 문학은 지금의 정권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잘잘못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내 시는 레인보우를 노래할 거예요. 우리 남아공도 레인보우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대륙 전체도 그래야겠지요.”
남아프리카에서 레인보우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문학이 하는 일은 차이와 다양성을 지닌 대지의 생명체들을 향해 그 존재 하나하나의 고유한 이름을 호명해주는 것이다. [아시아]와 마지막까지 경합했던 매체의 제호가 레인보우였다. 레인보우는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진 것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아시아]는 서로 다른 미학적 개성들이 모여 하나의 숲을 이루는 형식으로 준비되어왔다. [레인보우 아시아]라는 절충안도 나왔지만 아시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을 통해 레인보우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었다.
  
제호 [아시아]는 단순히 공간으로서의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학적인 지역자치제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분권주의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자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타자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책이 부디 무지개의 정신을 견뎌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제임스 메튜를 만나는 것으로 매체 준비를 위한 모든 일정이 끝났다. 낡고 작은 가방을 메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맨발로 무료도서관을 찾아가 에밀졸라와 디킨스, 톨스토이와 존 스타인벡을 읽던 검은 피부의 열두 살 소년이 그의 굽은 등 위로 겹쳐졌다.
  
남은 하루, 로빈아일랜드를 방문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던 곳. 배가 높은 파도를 타고 넘을 때마다 바닷물이 갑판을 넘어왔다. 18년 동안 이곳에 수감된 만델라는 1990년 석방되어 아프리카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팬아프리카콩그레스(범아프리카연합)의 지도자 로버트 소부퀘(Robert Sobukwe)를 비롯한 수많은 흑인운동가들은 영원히 섬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투어버스의 가이드는 희생당한 흑인운동가들의 이름을 끝도 없이 열거했다. 그는 내 연배의 흑인 사내였는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에서 흑인들이 그 감옥에서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설명할 때 그의 눈동자는 물기로 촉촉이 젖곤 했다. 버스 안의 백인들은 아무도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내 옆에 앉은 두 젊은 흑인 남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관광객들 중에서 흑인은 그들뿐이었다. 로빈아일랜드를 떠날 때까지 내 시선은 자주 그들을 향했다. 그들의 완벽하게 검은 피부, 아프리칸스어로 조곤조곤 주고받는 대화, 감옥 벽의 낙서를 들여다보는 슬픈 눈동자, 고통스런 몸짓...... 아름다웠다. 검은 것도 아름다웠다. 로빈아일랜드에서 내가 본 것은 소부퀘의 흔적도 만델라의 독방도 아닌 그 두 사람이었다.

그들과 한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그들은 내가 지닌 검은 것에 대한 미적 태도를 바꾸어놓았다. 고백하건대, 아프리카에 올 때까지도 나의 미적 영토 안에 검은 것은 없었다. 내 머리는 차별에 반대했지만 내 상상력 속에서 검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화석 속에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 안에 존재하는 가치가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나는 남아프리카의 대지 위에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아시아]는 아시아의 대지의 밖에서 출현하는 창조적 상상력들과 소통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모든 편견과 대립은 무지와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아시아]는 다른 대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교류하고, 교류를 통해 이해하는 소통을 지향할 것이다. 이해가 없는 교류는 맹목으로 흐르기 쉽고, 교류가 결여된 이해는 실체를 놓치고 주관으로 흐르기 쉽다. 진정한 소통은 이해와 교류를 통해 상대를 변화시키고 나도 변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프리카를 떠나며 무슨 각오처럼 다시 생각했다.

  
편집실에서

창간호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옥고였다고 자랑하는 일은 삼가겠다. 편집실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취재 중이던 한국의 KBS기자 한 명이 억류되었다. 나는 검토하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고 알리 제인의 글을 찾아들었다. 촌철살인의 문장으로 하마스가 집권한 팔레스타인의 내면 풍경을 묘사한 ‘나를 너무 밀지 마’를 읽으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 문장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하마드 자카리아의 산문도 다시 읽었다. 읽는 동안 자주 그의 멋진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그는 말했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시는 기억한다, 고.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듣는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 낭만적인 언어가 그의 내부에서 만들어지기까지 그가 이스라엘의 점령지에서 지불했을 잔인한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시간 관련 속보가 이어졌고 한국 국민의 눈길은 일제히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창간호를 장식한 소설 [문]을 쓴 오수연이 떠올라 작가회의의 김형수 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한국정부의 말은 안 믿어도 오수연의 말은 믿을 것 같았다. 오수연은 아랍이 겪고 있는 고통을 증언하기 위해 이라크의 전쟁터로 달려갔고,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위해 지치지 않고 글을 써왔다.
  
오수연과, 그녀를 이라크로 파견했던 단체인 작가회의의 김형수 총장은 이미 팔레스타인 작가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그 편지가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억류되었던 기자는 풀려났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주목했던 팔레스타인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정말 팔레스타인을 보긴 보았던 것일까. 어쩌면 아무도 보지 못했던 팔레스타인의 일부가 [아시아]의 창간호 지면을 채우고 있다.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은 그 어떤 곳이기 이전에 카산 카나파니의 나라이며 [하이파에 돌아와서]의 무대다. 그리고, 상처받은 것들을 기억하는 시가 남아있는 나라다. 몽골과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도 [아시아]의 지면 위에서 다르지 않은 기억력의 일부가 되었다.  
  
서구가 주도했던 20세기, 이 전쟁과 야만의 세기에 수많은 문명의 유전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지구상의 어딘가에서 어떤 기억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다.
  
[아시아]가 아시아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지 못하도록 하겠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만용이다. 서구 근대의 가치를 대체하는 아시아담론을 창출하겠다는 다부진 야심도 [아시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시아]는 욕심을 내고 있다. [아시아]가, 기억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는 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런 시의 거처는 되고 싶다. 누추한 일상과의 고투를 멈추지 않는 치열한 산문정신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산문정신의 열광적 지지자이기를 포기하진 않겠다. 아시아적 상상력의 중심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시아]의 모든 지면을 아시아의 대지에서 출현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숲으로 만들고 싶은 야심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아한 꿈인지를 모르지 않는다. 수면 위에서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백조의 물밑 풍경에 대해서도 모르지 않는다. 수면 아래에서 혼신의 힘으로 물갈퀴를 젓는 백조처럼 창간호가 나오기까지 편집위원들과 함께 허우적거렸다. 다행히도 관심을 가져주는 독자들이 있다면 그분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이후의 길을 끌고 갈 이정표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다.  

  

                
2006년 5월 여러 편집위원들을 대신하여
                                                               방현석
  
 
    Inaugural Message from the Edi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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