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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ASIA』를 읽고
 최지연  | 2006·06·28 17:14 | HIT : 2,068 | VOTE : 356 |
  “날마다 뉴스 시간에 만나는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문학을 읽어본 한국인은 몇 명이나 될까?”라는 질문이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서구의 문학들을 접할 기회는 많아도 같은 아시아의 문학은 일본문학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읽어 본 기억이 없다. 대학에서 수업 시간을 통해 읽은 아시아 문학들은 낯설고 이해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같은 문화권에서 우리는 왜 그들을 낯설게 여기고 이해 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을까 반성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읽은 가산 카나파니의 작품이나 리처드 라이트의 작품이 그 반성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충분히 다가설 수 있는 작품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그런 것들에 다가가는 것이 어려웠을까. 아마도 그런 기회가 적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순간 세계화와 더불어 우리 문화권을 되돌아보려는 시도가 내게는 상당히 반가운 일로 느껴진다.

  계간 『ASIA』는 다양한 아시아의 단편 소설 작품들을 싣고 있다. 사실 개인적 취향에 썩 들어맞는 작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의 문화적 색이 드러나는 작품들이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특히 프라무디아의「이늠」이라는 작품은 소설의 미학적 성취를 떠나서 이해해야 할 작품으로 느껴졌다. 문장이 단순하고 스토리가 엉성한 것이 흠이었지만, ‘이늠’이라는 여자 아이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처한 불합리한 사회적 상황이 객관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읽으면서,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홉 살 여자아이를 결혼시킨다는 것이 어쩐지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아이는 이혼을 하고 집안의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상황이 적어도 과거에는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상황이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혼이라는 풍속을 우리가 오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인간의 수명이 짧아 조혼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도 했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것이 가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약한 나라의 약한 선택이 가슴이 아프게 느껴졌다.
  몽골의 L. 울찌툭스의 작품「수족관」은 다른 아시아의 작품과 다른 상상력이 돋보였다. 물론 새롭다고는 말 할 수 없는 상상력이지만 어쨌든 아시아의 답답한 상황과는 대조되는 작품으로 보였다. 내가 아시아의 작품을 보는 눈이 좁아서 이 작품의 상상력이 남다르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상상력들이 존재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어느 날 갑자기 물고기가 된 여자의 이야기는 어쩐지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런 혐의를 벗어 날 수 없었던지 작품 곳곳에 잠자의 이름이 등장한다. 카프카의 벌레와 울찌툭스의 물고기는 그 정체성이 비슷하다. 내게는 둘 다 일상의 박제가 되어 버린 존재들의 탈출기로 보인다. 다만, 울지툭스의 물고기는 공간에 대한 인식을 소설에 끌어 들여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한 염증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좁은 수족관은 어쩌면 좁은 몽골의 세계화를 꿈꾸고 있는 작가의 의식이 아니었을까?
  그 밖에 한국 작가 두 명의 작품들도 접할 수 있었다. 사실, 문학 강연을 통해 통역을 하는 오수연을 본 적이 있었지만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오수연 작가는 전쟁으로 두려운 공간이 되어버린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이 자신의 감수성을 많이 변화시켰고,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는 말이 오수연 작가의 소개말에 적혀 있다. 「문」이라는 작품이 그 결과물일 수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나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맥락이 없이 상황의 단절로만 이루어져 있다. 각기 다른 공간의 상황과 묘사만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답답한 상황의 정조는 알 수 있겠으나, 나처럼 그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이 작품은 읽어내기 어려운 암호문으로만 보인다. 만약, 작가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소설가에게 리포트를 쓰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 상황을 경험한 앞선 자로서의 책임에 민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간 『ASIA』에는 내게도 익숙한 이름인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에세이가 실려 있었다.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문학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강연을 통해 먼발치에서 보기는 했지만 그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로서의 의식이 확고하고 신념이 있어 믿음이 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 날, 나는 문학 강연을 하러 온 사람들이 왜 팔레스타인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조국이 팔레스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학의 토양이 정치적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는 팔레스타인이니 이스라엘이니, 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그들의 작품들을 읽게 되고, 그 작품 속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서 저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들이 그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 깨닫는다. 문학작품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표현을 싫어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글을 무기로 삼고 있는 또 하나의 투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카리아 모하메드의 모습에 강인함이 깃들여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동이 느껴진다. 이 에세이 「연꽃 먹는 사람들」도 강인한 작가의 정신과 섬세한 필치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작가는 신념에 있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절의 풍경과 연꽃에 마음을 뺏길 정도로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영락없는 작가이다. 그저 나는 이러한 작가정신이 정치적 풍파에 더 이상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근까지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인정했다고 하니, 참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상황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어쩌면 이러한 제도가 유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인식이 부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문화를 주도해 왔던 나라에서 이것들을 외면해서 일까?『ASIA』를 읽으면서, 지배자의 눈이 아닌 피지배자였던 나라들의 움트는 상상력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시도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쁘다. 그런데, 자꾸 바오 닌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청년들이 이 잡지를 읽긴 읽을까?” 제발 그의 걱정이 기우였기를 바라며...
  
  첫번째의 짜릿함 두 번째의 흐뭇함  저공비행 06·07·17 1956
  아시아 문학의 스펙트럼  류진 06·06·27 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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