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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국민작가가 쓴 눈물의 창녀 이야기[북데일리2007.05.03]
 Asia  | 2007·05·03 13:57 | HIT : 5,796 | VOTE : 1,501 |
필리핀 국민작가가 쓴 눈물의 창녀 이야기
  
‘에르미따’는 마닐라의 유명한 환락가의 이름이다. 스페인어로는 ‘은둔자’라는 뜻이다. 에르미따는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필리핀 지배계층과 외국인들의 호화 주택가였다가 1945년 미군의 필리핀 탈환 때 폐허가 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 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환락과 유흥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에르미따’는 필리핀, 아시아 주요도시들이 겪은 근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상징적인 이름이다.

동명의 소설 <에르미따>(아시아. 2007)는 필리핀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é)의 작품이다. 비극적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난 한 여인이 매춘부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치열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1945년 미군이 점령군 일본군으로부터 필리핀을 탈환하는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에르미따 로호’의 가계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형성된 부유한 메스티소(스페인계 혼혈) ‘로호 가문’이다. 이야기는 호세 로호의 세 손자, 손녀 대부터 시작된다.

맏딸 펠리치타는 미군 총사령관의 정부(情婦) 출신으로 사교계를 주름잡는 인물이다. 아들 호셀리토는 미국에 유학 갔다가 미군에 입대한다. 그는 귀국 후 독재정권 하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둘째딸 콘치타는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사생아를 낳는다. 그녀는 수도원 보육원에서 딸을 유기하다시피 남긴 채 미군 장교와 결혼하여 필리핀을 떠난다. 그 아이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 ‘에르미따’이다.

에르미따는 출생이 비밀에 부쳐진 채 보육원에서 자란다. 우연히 출생의 비밀을 엿듣게 된 그녀는 자신이 ‘로호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차갑다. 에르미따는 동성애자인 외삼촌으로부터 성추행까지 당하는 치욕을 겪는다. 결국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고급요정 ‘카마린’을 제 발로 찾아간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다.

“만약 매춘을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신념 없이, 생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을 벌기 위해 ㅡ 그것도 아주 엄청난 돈이겠죠 ㅡ 하는 행위라고 가정하면, 누가 진짜 매춘부일까요? 주위를 돌아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쉽게 볼 수 있어요.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정치가, 제복을 입은 사람들(아마 수녀들조차도, 라고 에르미는 생각했다), 기업가, 작가들 그리고 언론인들도 아주 많지요. 그래요. 교수들도 예외는 아닐 거예요.”

작가는 에르미따의 짓밟힌 삶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에게 폭행을 가했던 이들에게 복수극을 전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작가의 의지는 숱한 지배와 수탈에 시달린 조국에 대한 찬미이자 훼손된 역사에 대한 회복의 열망으로 읽힌다.

1988년 출간된 <에르미따>는 파격적인 소재와 대중적 호소력이 결합되었다는 평가 속에 필리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세계 각국으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매거진은 “그레이엄 그린, 앙드레 말로, 조지프 콘래드 등의 소설들과 함께 F. 시오닐 호세의 <에르미따>는 동남아시아에서 씌어진 10대 소설 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평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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